지금은 그 인기가 시들해져 버렸지만 80년대에는 한국복싱의 황금기였다.
당시 한국이 보유하고 있던 세계챔피언만 해도 장정구,유명우,박종팔 그리고 그 이후 문성길을 위시해서 박찬영(무구루마와의 경기는 명승부중에 명승부였다)김용강,이열우 등이 챔피언에 올랐으며 당시 복싱의 인기는 말로 형언할수 없을 정도였다.
때와 같이해 해외복싱도 팬들의 주요관심사 중 하나였는데 지금의 야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한국야구를 즐겨하는 팬이라면 비록 리그는 다르지만 야구라는 공통점에서 메이저리그를 보는것과 같기 때문이다.
[토마스 헌스 vs 마빈 해글러 경기 포스터]
야구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웬 복싱 이야기를, 그리고 드닷없이 마빈 해글러라는 선수 이름을 글 제목에 달고 글을 쓰느냐고 다소 고개를 갸우뚱 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의 나이 비슷한 연배부터 시작해서 그 윗 세대분중에 그당시 복싱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씨름과 더불어 야구와 복싱이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상상할수도 없겠지만 당시 해외복싱의 빅경기는 종종 생방송으로 중계를 곧잘 해주었다.특히 `특집 MBC 권투'(한보영 해설위원의 구수한 멘트)가 기억나는데 그중 아직도 잊을수 없는 경기가 있다.
1985년 4월 15일(당시 필자는 초등학생이었다)에 열렸던 그 경기. 바로 `세기의 대결' 이라 불리웠던 마빈 해글러 vs 토마스 헌스의 통합미들급 타이틀전이 그것이다.
해글러라는 이름은 같은 동네에 살던 형이 자주 언급을 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어떤 선수인지 본적이 없어서 무척 궁금했었는데, 외국 복싱잡지 였던 `링지'를 통해 알수 있었다.(그 형의 큰형이 외국잡지사 쪽에 일을 했었는데 그 경로를 통해서 구입했다고 한다) 첫인상은 정말로 무시무시했다. 청동상으로 만든것 같은 구릿빛 피부에 멋진 근육의 몸매,그리고 시원하게 머리를 밀어버린 대머리까지,그건 선수가 아니라 마치 전장터의 전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쯤 MBC에서는 광고시간에 연일 이대결을 홍보하고 있었다. 특히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가 시작되기전이나 끝난후 MBC 특유의 음악에 맞춰 이 대결을 홍보하던게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광고가 나오기전 해글러의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새삼스러운것은 없었지만 그와 대결할 헌스의 모습에 또한번 충격을 먹은 기억이 난다.
해글러보다 인상이 더 험악했기 때문이다. 긴 얼굴에 찌그러진 코 그리고 상대를 노려볼때 눈의 흰자위만 보이게끔(아마 일부러 그런듯) 째려보던 눈빛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헌스를 알기전 해글러를 먼저 알았고,그의 별명이 `마블러스' 즉 경이적인 미들급 챔피언이란 별칭이 있었기에 어느순간부터 필자는 해글러의 팬이 되고 말았다. (그의 경기를 단 한번도 본적이 없음에도 엄청나게 끌렸다. 아마 해글러 라는 이미지가 주는 이름이 강렬해서 일것이다.)
당시 누가 이길것인가 에 대한 도박(?)을 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다. 해글러가 이긴다는 쪽은 그가 카를로스 몬존 이후 역사상 최고의 미들급 선수이며 강력한 펀치력과 경이적인 맷집 그리고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함에 손을 들어 주었고,헌스가 이긴다는 쪽은 그의 긴 신장과 리치,그리고 강력한 그의 스트레이트 한방에 걸리면 천하의 맷집왕 해글러라도 버티지 못한다라는게 그 이유였다. 당시 외국의 복싱전문가들은 약간이나마 헌스의 우세를 점치는 사람이 많았던걸로 기억한다.
웰터급에서 시작해 Jr 미들급까지 접수한 헌스의 상승세,그리고 무엇보다 치고 빠지는 헌스의 다리를 해글러가 잡기 벅차다는게 그 이유였다. 방학을 기다리는 초등학생처럼 4월 15일이 빨리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연일 계속되던 두선수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언론의 관심을 뒤로 하고 역사적인 그날이 밝았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 경기는 현지 생방송이 아닌 녹화방송으로 기억한다. 학교가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집에 와서 흑백 텔레비젼을 켜봤지만 경기소식을 알턱이 없었다.(지금처럼 인터넷이 있었던것도 아니고)
당시 중학생이었던 동네형에게 물어봐도 누가 이겼는지 모른다고 했다.이미 시합은 끝났을텐데 라며 녹화중계하는 시간을 기다린 끝에 해글러와 헌스를 드디어 저녁에 만날수 있었다.
[1라운드 시작부터 헌스를 강력하게 압박하며 치열한 난타전을 벌이는 해글러]
선수소개가 끝나고 1라운드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일을 해글러가 저지르고 있다는걸 알수 있었다.
해글러는 `슬로우 스타터'인 선수다. 강력한 맷집과 체력으로 상대를 서서히 지치게 한후 침몰시키는 선수로 알고 있었는데,공이 울리자 말자 라이트 훅 선제공격으로 헌스를 당황시킨 것이다. 뜻밖의 해글러의 동작에 당황한 헌스도 맞불을 놓았다.
1라운드부터 용호상박의 난타전이 벌어진 것이다. 전문가들이나 팬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헌스를 코너에 몰아넣고 좌우 연타를 날리면서 접근하는 해글러에게 헌스 역시 죽창같은 스트레이트로 맞받아쳤다.
물론 클린히트는 해글러쪽이 좀더 우세했지만 누군가 큰것 한방에 걸리면 그대로 끝날것 같은 느낌에 필자의 심장은 터질것만 같았다.
해글러의 우세속에 난타전이 벌어지던중 헌스의 강력한 라이트가 해글러의 안면에 꽂힌다.헌스의 별명이 `디트로이트의 코브라'다. 마치 코브라가 먹잇감을 휘어감듯 날린 회심의 강타였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그걸 안면에 허용한 해글러는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금동안 헌스의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맞고 쓰러지지 않은 선수가 없었는데 말이다.파나마의 영웅인 로베르토 두란을 2R KO로 보내버린 헌스의 일발 필살기를 맞고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더욱 거칠게 헌스를 몰아부치는 해글러를 보고 당시 필자는 경악해 버렸다.(뭐 저런 놈이 다 있냐?;;) 당시 이 대결에서 1라운드가 얼마나 치열했고 멋진 라운드였냐면 85년 링지가 뽑은 `올해의 라운드'에 선정 되었으니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그 치열했던 1라운드를 이해할수 있을것이다. 해글러는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전차처럼 오로지 전진뿐인 투지와 적극성을 보였다.
지금에 와서야 이해가 가지만, 당시 해글러의 1라운드의 공격은 멋진 작전이었다. 거리를 두면서 싸우게 되면 헌스의 긴 리치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잽과 스트레이트 그리고 빠른발을 잡지 못해 고전할것이란 예상을 미리 하고 첫 라운드부터 밀어붙인게 적중했던 것이다. 1라운드가 끝나는 공이 울리자 해글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코너로 돌아갔고 그런 해글러의 등을 바라보며 헌스는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코너로 가서 앉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헌스가 상당히 많은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헌스의 빠른 발을 무디게 하기위해 해글러는, 헌스의 좌우 옆구리와 복부공격에 상당한 공을 들였는데 1라운드 동안 상당한 데미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2라운드 초반 헌스의 강력한 라이트 카운터를 안면에 허용하고 피부가 찢어진 해글러]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얼마후 해글러의 이마에 컷트가 생긴다. 안면이 찢어진 것인데 혹시 경기가 취소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잠시, 별 데미지 없이 해글러는 이전과 같이 더욱 거칠게 헌스를 공략한다.(헌스의 스트레이트를 허용한걸로 기억한다)
경기는 이미 해글러 쪽으로 넘어간 것이 한눈에도 보였다. 바디공격에 데미지가 쌓인 헌스는 스탭이 꼬여 아슬아슬한 모습을 스스로 연출하기도 했으며 그의 전매특허인 `트리플 잽'이 전혀 보이지도 않았고,간간히 던지는 공격에는 스피드가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2라운드 공이 울리면서 코너로 돌아가는 두선수를 보면서 이 경기의 운명은 3라운드에서 결판이 날것같은 느낌이 들었는데,당당하게 자신의 코너로 걸어가는 해글러와는 달리 헌스의 동작은 전혀 힘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마지막 오른손 훅이 헌스를 침몰시킨 피니쉬 펀치다.헌스의 눈동자에 촛점이 사라졌다.]
운명의 3라운드 공이 울렸다. 라운드가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아 2라운드에서 찢어진 해글러의 상처 점검을 위해 잠시 경기가 중단 되었지만 이내 다시 해글러의 파이팅이 시작 되었다. 철저하게 헌스의 발을 묶어놨다고 판단한 해글러는 경기를 끝내려는듯 코너에 헌스를 몰아넣고 더욱 강한 프레싱을 복부와 안면에 가한다. 이미 헌스의 발은 자신의 몸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어 버렸으며 조만간 경기가 끝날거라 생각했다.그 순간,해글러의 라이트 롱 훅이 헌스의 턱에 꽂힌다. 충격을 받은 헌스는 뒷꽁무니를 빼며 백스탭을 밟지만 이걸 놓칠 해글러가 아니였다. ?i아가며 회심의 라이트 훅을 다시한번 턱에 강타하자 힘없는 인형처럼 헌스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고 만다.
허연 눈을 뜨며 링바닥에 쓰러져 천장을 바라보던 헌스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수 없다. 물론 간신히 몸을 추스려 일어나긴 했지만 이미 승부는 그걸로 끝이였다.더이상 경기를 속행할수 없다고 판단한 리차드 스틸 주심은(콧수염을 기른 아주 유명한 흑인 주심이다.) 몸을 추스리지 못하고 있는 헌스를 안고서 경기중단을 선언한다.
[헌스는 쓰러진 후 다시 일어서긴 했지만 주심은 스톱을 선언한다.]
[헌스와의 경기가 끝난후 승리의 세레모니를 하고 있는 마빈 해글러]
전세계의 이목과 관심을 끈 이 경기는 정말 한편의 잘 짜여진 각본 그 자체였다.물론 해글러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긴 하지만 말이다. 헌스의 빠른 다리를 잡기위해 초반부터 꾸준히 보디공격을 한점, 헌스측의 예상을 깨고 초반부터 강력하게 몰아부친 해글러측의 작전,그리고 자신의 맷집을 믿고 돌진한 해글러의 능력 등, 이 모든것이 어우려진 멋진 한판 승부였기 때문이다.
이후 해글러는 1986년에 `아프리카 괴수'라 불리우던 존 무가비와 다음 시합을 펼친다.(필자의 기억으로는 당시 무가비 전적이 27전 전승에 27KO의 가공할만한 전적을 보유한 선수로 기억한다.) 여타의 경기보다 다소 무기력했던 해글러는 특유의 슬로우 스타터 기질대로 초반의 부진에서 벗어나 경기 중반부터 리드를 잡기 시작한 끝에 11회 KO로 승리한다.
이경기를 보며 가장 기뻐했던 선수가 있으니 바로 슈거레이 레너드다.
경기장에서 이경기를 직접 본 레너드는 해글러가 예전만 못하다는 판단을 하고 그와 싸울것을 결심했다는 후문이 있었는데(당시 레너드는 링을 떠나 있었다.) 결국 그의 바람대로 경기를 갖게 된다.
[해글러의 마지막 경기가 된 슈거레이 레너드와의 시합전 포스터]
87년 이 대결에서 레너드는 경기내내 시종일관 치고 빠지는 간사(?)한 작전을 펼치며 결국 2:1 판정승을 거둔다. 시합 이후 경기결과를 납득하지 못한 해글러는 엄청난 판정 불만을 언론에 내비치었으며 자신이 이긴 경기라며 억울해 했었다. 그리고 깨끗하게 글러브를 던지며 은퇴를 한다. 당시 해글러의 은퇴는 다소 아쉬운 점이 많았다.특히 헌스와의 2차전 그리고 레너드와의 복수전이 얼마든지 열릴수 있었으며,거기에 따라오는 엄청난 파이트머니를 벌어들일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거부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수말년을 비참하게 보내야 했던 그의 선배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던 해글러의 본능도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당시 레너드와의 경기결과를 놓고 누가 이긴 경기라고 설전을 벌이는 팬들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해글러 역시 레너드와의 대전은 자신이 이긴 경기라고 확신을 했으며 결국 그의 주장대로라면 선수생활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이끌고 명예롭게 은퇴한다는 스스로의 자위도 있었으리라. 또한 당시 레너드의 인기는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높았으며 간혹 심판덕을 보는 경기도 분명 있었다.헌스와 레너드의 2차전은 누가 보더라도 헌스의 승이다.무승부 판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는다.
[경기 중반 난타전을 벌이는 양선수]
은퇴후 영화배우로도 활약을 했으며 간혹 샌드백을 치던 그를 보고 링에 컴백할 거라는 기쁜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그는 끝내 다시 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해글러의 위대함은 말로 형언할수 없을만큼 뛰어나다. 적극적이지 않고 주로 받아치는 경기를 펼치는 사우스포(왼손잡이) 복서를 싫어하는 미국팬들의 성향을 알기라도 하듯,그는 항상 적극적인 공격을 선호하던 왼손잡이 복서였기 때문이다.필자의 기억으로는 앞손(오른손) 어퍼컷을 리드 펀치로 낼 정도로 복싱 테크닉이 뛰어난 선수로 기억한다. 강철과 같은 체력,인간이라고 믿기 힘든 가공할만한 맷집,그리고 엄청난 펀치력을 보유한 메사추세츠 출신의 이 경이로운 미들급 챔피언 `마블러스' 마빈 해글러.
필자의 학창시절을 즐겁게 해준, 그리고 이렇게 추억의 한조각을 끄집어 낼수 있게한 그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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