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 소리에 목소리가 묻힐까봐 다시 한번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다.
뙤약볕이 쏟아지던 1991년 8월 어느 여름날.
우리집과 병채집은 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그렇기에 창문을 열어 그렇게 큰 소리로 부르지 않아도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박 밭에서 농약을 치고 와 점심을 우리집에서 먹기로 하고 집에 갔던 친구는 우리 부모님들의 식사가 끝날때를 기다린 것 같았다. 친구 부모님과 겸상을 한다는게 부담 스러웠던 것이다.
날마다 얼굴 보고 인사하고 하는 사이지만 어찌 그러한 어려움이 없을까.
난 그래서 일부러 부모님의 식사가 끝날때까지 기다렸다가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
1995년 8월 22일. 서울 신도림동
일주일 후 입대를 앞두고 서울에 도착했다. 친척집에 찾아 갈수도 있었지만 난 신도림으로 향했다.
친구 병채가 고향을 떠나 살던 곳이 바로 신도림이었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군입대를 앞두고 특별히 할것도 없었기에) 술만 마셨다. 가끔 당구도 치러 가고, 야구장에도 가고 했지만 당구와 야구가 눈에 들어올리가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를 위해 친구는 일주일의 시간을 모두 비워놓았다. 나에겐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 친구에겐 그 시간이 나에 대한 위로의 시간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26개월 후 전역 축하파티에서다.
1995년 10월 13일 훈련소 퇴소식
어떻게 알고 친구가 퇴소식에 왔다. 그 먼 전방까지 새로 생긴 여자친구와 함께.
“니 얼굴 완전 푹 삭아 부렀다잉. 아따 못알아보겠네.” 하며 놀리던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그 친구는 군대 면제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참 안쓰러웠나 보다.
1997년 여름 어느날.
내일이면 병장 휴가를 갔다온 후 4개월만에 포상 휴가를 나가는 날이다. 친구에게 휴가 나간다고 전화를 했는데,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4박 5일 간의 휴가를 모두 친구와 함께 보냈다. 친구에겐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난 그 시간이 그 친구를 위로하는 시간이었다.
1997년 10월 23일 군 전역날
문산에서 신촌 역까지 기차를 타고 와 내린 전역일이다.
군대 동기들과 야한 영화(노는 계집 창으로 기억) 한편을 보고, 그리고 4명이서 식사를 하고 각자 고향으로 향하는데 왜 그렇게 마음이 이상한지. 곧바로 친구집이 있는 신도림으로 향했다.
벌써 어둑어둑 해진 해질녁이다. “고생 많았다. 지금 이자리에서 이별주를 한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6개월이 흘렀네. 세월 참 빠르다. 벌써 2살이나 더 먹고...”
원래 한대 있던 기타가 2대로 늘어나 있었다. 샀냐고 물어보니 내가 전역하면 같이 연주해 보고 싶어 중고로 구입했단다. 원래 나에게 처음으로 기타를 가르켜 준 사람이 병채다. 이 친구 형제들은 모두 음악에 재능이 뛰어났던, 그러니까 형제들로만 밴드를 구성할수 있을 정도다.
나 역시 어릴때부터 이러한 영향에서 자유로울수 없었다. 중학교 2학년때 노고지리의 ‘찻잔’을 통해 나에게 기타를 가르켜 줬다. 스콜피언스의 ‘홀리데이’는 내가 처음 기타를 배울때 스트로크와 아르페지오 주법을 그리고 산울림의 ‘청춘’을 통해 감각을 익혀줬던 친구다. 이 친구는 고등학교를 끝으로 음악을 접었고, 난 20대 중반까지 그 꿈을 버리지 못했기에 이후엔 기타 실력이 역전이 되긴 했지만. 가르침을 준 사람에게 내가 가르켜 주는 웃지 못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빨리 기타를 익히는데 있어 스승과 같은 존재임엔 틀림없었다. 그날 우린 헬로윈의 “어 테일댓 웨즌트 라이트”를 연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누가 퍼스트를 치고 세컨을 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2003년 병채 결혼식
친구가 결혼을 한다기에 서울에 올라왔다.
그런데 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전날 만취해 찜질방에서 잤는데 눈을 떠보니 오후 4시였다. 전화기는 불이 나 있었고 미련한 나를 탓하기엔 시간을 되돌릴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났고 미안했다. 돌이킬수 없다는 걸 알고 난 후엔 이 친구를 볼 면목이 없었다.
내가 이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게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였다.
훗날 딸을 낳았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얼굴을 볼수가 없었다. 개인 신상으로 인해 이 당시 난 가족은 물론 친구들과 모두 연락을 끊고 지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병채 어머니와 우리 어머니는 같은 성씨로 언니 동생 하는 사이다.
어릴때 둘이 지나가면 동네 어르신들이 너희 둘은 이란성 쌍둥이냐? 왜 맨날 같이 다니냐고 했을 정도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내 나이 5살 그리고 친구 나이 4살(한살 차이는 친구 먹는다. 친구는 7살에 나와 같이 입학했으니)때부터 어울려 다녔던 것 같다. 그리고 중학교를 거치며 사춘기를 같이 보냈고, 사고도 참 많이 치고, 개구장이 노릇은 둘이 똑같이 하고 다녔던 유년시절이 떠오른다.
20살때 방에 촛불 하나 켜놓고 술을 마시며 정치를 토론하고, 음악을 토론하며, 야구에 대한 논의를 함은 물론 여자에 대한 토론도 빠지지 않았던 안주거리였다. 누구나 이 시절이 그러했겠지만 돌이켜 보면 참 별난 친구사이였고 같은 영혼의 소유자였다. 죽고 못사는 이러한 사이를 알고 있는 다른 친구들은 어째서 둘이 연락도 안하고 사는 사이가 됐을까. 하며 의문시 하고 있다는 것도 내 다 알고 있다.
2012년 2월 5일
잠에서 깨보니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전화를 해보니 친구 중 한명이다.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았냐고 물어보니 “전화번호 아는게 어렵냐”
“석구야 놀래지 마라. 오늘 병채 죽었다.” 9년만에 걸려온 친구 전화(난 고향 친구들과 모두 인연을 끊고 지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만 그게 중요한게 아니기에)에 그동안 잘 살았느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친구의 비보를 들어야만 했다. 죽은 이유가 “간경화”란다. 기가 막혔다. 40도 안된 나이에 간경화라니....
이혼 후 친구는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항상 취해 있었고 병원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음에도 죽는 그날까지도 술에 취한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문득, 20대 중반때 어느 술집에서 농담을 했던게 생각났다. “야. 우리는 참 술 담배 좋아 한다. 아마 훗날 우리가 죽으면 술 아니면 담배로 죽을 것 같은데. 하하하” “내가 봤을때 병채 넌 집안 내력상 술로 갈것이고 난 집안 내력상 담배가 더 큰 문제가 되지 않을까. 야 그런 이야기는 달나라에나 가서 하고 마시자.”
왜 난 친구의 비보 소식에 이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올랐을까.
방금 또다른 친구에게서도 연락을 받았다. 울면서 하는말이 나에게 할 말이 많단다. 너 역시 많을 거다.
그리고 생전 병채가 나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우리가 어떻게 맺어진 친구인데 10년 가까이 연락없이 살다 병채가 죽었다고 연락이 되다니..
그렇다. 이 글을 쓰고 난 장례식장으로 달려가야 한다. 미안함을 모두 안은채...
아버지께 친구 소식을 전하니 참 슬퍼 하신다. 원래 고향 친구들이란게 옆집에 숟가락이 몇개 있는지까지 알정도이니, 아들 친구의 죽음이 남의 일 같지는 않으시겠구나 생각하니 또 목이 메인다.
세상 아무것도 아니다. 친구의 죽음을 접하고 나니 내 유년시절과 내 살아온 역사의 절반이 모두 사라져 버린듯한 느낌이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참 많이 보고 싶었다. 조만간 만나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 늦어버린 것 같다. 저승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날 많이 원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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