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안타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일본야구(NPB) 역사를 통틀어도 2천안타를 기록한 선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2천안타)은 위대한 선배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것, 올 시즌에 반드시 달성할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올해로 요미우리와의 4년째 계약 마지막 해가 되는 오가사와라 미치히로가 지난 오프시즌에 연봉 계약을 마치며 내뱉은 말이다. 그동안 오가사와라는 언론을 통해 자신의 성적이나 기록에 관한 말들을 극도로 아껴온 대표적인 선수중 한명이었다. 그런 그가 드닷없이 인터뷰 자리에서 2천안타 달성을 언급한 것이다.
우리보다 프로야구 역사가 오래된 일본에서도 통산 2천안타를 기록한 선수는 겨우 38명뿐이다.
팀수와 선수구성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타자에게 2천안타는 곧 ‘위대한 선수’로 불리는 척도가 될만하다. 한두시즌 반짝 활약하다 이후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선수가 부지기수다. 특별한 일이 없는한 올 시즌중 2천안타 달성이 유력한 오가사와라의 2천안타 발언은 그래서 더욱 경이로운 의미으로 다가온다.
7월 9일 한화 이글스와의 광주경기에서 이종범(KIA)이 한일 통산 2,000안타를 쳐냈다.
이종범 이전에 2천안타를 기록한 선수는 양준혁(삼성)과 전준호(와이번스 코치) 단 두명. 비록 순수 국내에서만 활약하며 기록한 2천안타는 아니지만 어떠한 의미에선 이종범의 2천안타는 값어치 면에서 평가를 달리해야 한다.
3년동안 일본야구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활약하며 쳐낸 286개의 안타까지 합한 안타개수이기 때문이다. 야구에서 “IF” 란 아무 소용없는 짓이지만 그가 일본에서 활약한 3년이란 세월이 아닌 오직 국내에서만 뛰었다면 통산 안타부문에서 또하나의 신기원을 이뤄냈을 것이란 예상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더 빠른 시간에 2천안타를 달성했을 것이다.
▶ 1997년 이종범이 남긴 기록들
대부분 이종범의 최고시즌을 논할때 1994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1997년의 이종범이야말로 다시 나오기 힘든 역사를 쓴 한해였다고 본다.
1995년의 군복무(방위)으로 인해 홈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던, 그리고 이듬해인 1996년 초반에도 홈경기만 출전해야 했던 이종범(113경기, 타율 .332 도루57개)의 기량만개는 1997년이 정확히 그의 전성기였다.
이해에 이종범은 타율 .324 홈런30개,도루64개의 성적을 남겼는데, 1번타자이자 유격수인 점을 고려할때 그의 홈런개수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이라 평가하고 싶다.
20대 후반의 나이 즉, 선수로서 전성기를 막 내달리던 이때의 이종범의 폭풍질주는 돌이켜 보면 너무나 아쉽다. 이듬해 일본진출로 인해 더 이상 그의 모습을 볼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후쿠도메의 등장이 이종범을 외야수로 전향하게 했다?
일본에서 이종범의 외야전향을 후쿠도메 때문으로 오해하고 있는 팬들이 있는데 이건 사실과 다르다. 지금은 흔한 이름이 돼버린 후쿠도메는 일본야구 역사상 ‘대형 신인’의 기준으로만 놓고 보면 당시 역대 최고의 대어였다. 현역시절 일본야구의 반쵸(대장)라 불리던 ‘고시엔 스타’ 기요하라 카즈히로가 고교 드래프트에 등장했을때 6개구단으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후쿠도메는 PL학원(가쿠엔고교)을 졸업하던 해에 7개구단으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을 정도로 그의 잠재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고졸 야수로서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바로 후쿠도메였다고 보면 된다.
주니치, 또는 요미우리에서 프로생활을 꿈꿨던 후쿠도메가 곧바로 프로야구에 뛰어들지 않고 사회인 야구(닛폰생명)로 방향을 틀었던 것도 긴테츠 버팔로스가 후쿠도메를 1순위로 교섭권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후쿠도메는 사회인 야구시절인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로 출전해 은메달을 목에 걸었고 이종범이 주니치에서 첫시즌을 뛰었던 1998년에 주니치로부터 역지명 1순위로 계약에 성공한다.
이듬해인 1999년 후쿠도메는 유격수로서는 합격점을 줄수 없는 수비력이었지만 그걸 상쇄하고 남음이 있는 타격으로 데뷔시즌부터 풀타임 주전선수가 된다. 이해 이종범이 완전히 외야수로 전향한 것은 후쿠도메와의 수비력의 차이(후쿠도메 역시 훗날 3루수를 거쳐 외야수로 전향하게 되는데 유격수로서 안심하고 경기에 투입될 정도의 수비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호시노 감독시절인 1999년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가 다이에에게 패한것도 후쿠도메의 연이은 실책때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때문이 아니다. 1999년 이종범은 외야수로 이미 전향한 상태였고 그해 후쿠도메는 루키였다. 사실 관계를 명확하게 하고 싶어 언급했다.
▶ 2010 이종범 어디쯤에 와있나
선수가 은퇴를 하게되면 훗날 남는 것은 기록뿐이다.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기록보다는 뇌리에 인식돼 있는것들이 더 우선일수도 있겠지만 그의 플레이를 직접 보지 못한 야구팬들에겐 기록을 보고 선수를 판단할수 밖에 없다. 이종범의 통산 타율은 지난해까지 정확히 3할이었다.
하지만 올 시즌 타격부진으로 인해 이미 3할의 벽은 깨진지 오래다. 타자에게 3할 타율이 갖는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2할 9푼대 타자와 3할 타자의 차이는 불과 몇개의 안타개수의 차이겠지만 체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 무게감부터가 다르다.
더군다나 지난해 KIA가 통산 10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기에 이종범으로서는 ‘유종의 미’를 거두며 은퇴를 할수 있는 적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종범은 3할의 기록보다는 통산 2천안타 달성을 이루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3할 타율이 갖는 상징성과 2천안타의 값어치중 어느 것이 더 위대한 유산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3할 타율을 유지한채 은퇴한 또는 앞으로 은퇴할 선수보다 통산 2천안타를 달성하고 은퇴한(은퇴할) 선수가 훨씬 적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3할 타율에 너무 연연해할 이유도 없다.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1번타자로 손꼽히는 후쿠모토 유타카(전 한큐 브레이브스 통산 타율 .291)를 평가할때 그에게 ‘통산 타율 3할도 못쳤던 타자가 왜 역사상 최고의 1번타자라 하는지 의심스럽다’라고 말하는 전문가 그리고 팬들은 없다.
후쿠모토하면 ‘일본야구 역사상 최고의 대도’ ‘야구에서 도루가 갖는 의미를 일깨워준 최초의 일본인’ ‘불멸의 기록인 한시즌 106개의 도루’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먼저 언급되는 사실로 비춰볼때 훗날 이종범 역시 한시즌 최다안타(1994년, 196개), 최다도루(84개), 그리고 30홈런-64도루를 기록했던 이미지가 3할 타율보다 더 먼저 언급될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올 시즌 하나 더 늘어난 통산 2천안타 기록까지.
사실 이종범을 밀어낼 젊은 선수가 없는 팀 현실을 감안하면 이건 구단의 2군 정책을 탓할 일이지 지금 이종범의 선수말년 상황을 탓할것이 못된다.
사진/ KIA 타이거즈 제공
윤석구(http://hitti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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