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하 WBC) 아시아라운드가 모두 끝났다. 대회전 예상대로(?) 한국과 일본이 본선 2라운드에 진출하며 큰 이변없이 도쿄돔 일정이 끝난 지금, 이틀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렸던 사람은 다름 아닌 하라 타츠노리 감독이다.
지난 7일 한국과 첫대결에서 14-2 란 믿을수 없는 대승으로 한바탕 일본 열도를 들썩이게 했던 하라 감독은 이틀만에 일본야구를 원위치에 돌려놓으며 이젠 비판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야구 격언중에 "진정으로 강한팀은 한점차 승부에서 승리하는 팀" 이란 말이 있듯이, 0-1로 패한 일본은 첫경기 대승의 기쁨이 조 1위 결정전 패배로 묻혀져 버렸다.
한국전 영봉패의 중심에는 하라 감독의 작전실패가 두드러졌는데 특히 8회말 공격에서 `나카지마의 희생번트'가 바로 그것이다.
시간을 2008년 일본시리즈로 되돌려 보자.
센트럴리그 우승팀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퍼시픽리그 우승팀인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가 맞붙은 일본시리즈는 하라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해보다 중요한 시리즈였다.
2002년 요미우리 감독에 부임하자 말자 일본시리즈를 제패하며 그의 앞날에 탄탄대로가 열리는듯 했지만 이듬해에 리그 3위로 주저앉으며 감독직에서 물러났던 그는 2006년 호리우치 쓰네오에 이어 다시한번 요미우리 지휘봉을 잡는다. 하지만 요미우리는 그해 리그 3위에 그치며 2년연속 부진에 허덕이는데 하라의 입지 역시 위기였음은 마찬가지였다. 2007년 리그 우승을 차지해 간신히 체면치레에 성공하지만 클라이맥스에서 주니치에게 덜미를 잡히는 바람에 일본시리즈 진출이 무산되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당시 요미우리신문 회장인 와타나베 쓰네오의 분노는 광기에 가까울정도였는데 작년시즌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으며 다시한번 우승을 노렸지만 세이부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5차전까지 시리즈전적 3승2패로 앞서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뒷맛이 깔끔하지 못했음은 물론 이후 그의 감독 자질론까지 거론되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무엇보다 상대팀 감독인 와타나베 히사노부의 대범함에 패했다는 점이 더욱 하라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는데 이번 한-일전에서는 작년 일본시리즈 당시 와타나베에게 느꼈을 `학습효과'가 제로였다는 점도 눈여겨 봐야할 대목이다.
작년 일본시리즈 7차전, 초반 2-0으로 끌려가던 세이부는 5회초 외국인 타자 히람 보카치카의 솔로홈런으로 한점을 추격한 후 운명의 8회초 공격에서 2득점에 성공하며 3-2 역전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 8회 역전점수가 나왔던 배경에는 와타나베 감독의 배짱이 큰 몫을 차지했었다.
와타나베는 8회초 선두타자 카타오카 야스유키가 몸에 맞는 볼로 출루하자 과감하게 도루사인을 낸다.
보편적으로 한점을 뒤진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것도 경기후반이라면 희생번트가 당연한 수순. 하지만 와타나베 감독은 찬스에서 더욱 공격적으로 나간다. 이후 희생번트와 나카지마의 내야땅볼로 동점을 만든 후 히라오의 적시타로 결국엔 역전에 성공했는데, 이번 한-일전이 당시 일본시리즈와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8회말 이와무라의 삼진으로 1사가 되긴 했지만 발 빠른 이치로가 안타를 치고 나간 상황에서 하라는 아웃카운트 하나를 버리는 희생번트를 지시했다. 결국엔 후속타 불발로 실패. 사실상 이 순간이 이날 경기의 끝이었다. 한점차 승부의 배짱이 부족했던 극도의 초스몰볼을 선택한 하라의 작전미스다.
결과론이지만 만약 그때 하라가 배짱있게 공격적으로 나섰다면 어찌됐을까 하는 의문점이 남는다.
이번 대회들어 최고의 타격감을 자랑하는 나카지마에게 번트를 지시한 것은 역전은 염두에 두지 않고 무조건 동점만 생각했던 하라의 소심함 때문이다. 일본 최고의 타자인 아오키 노리치카의 적시타를 기대했다지만 상대투수가 같은 소속팀인 임창용이었다는 점도 석연치 않다. 연습경기에서는 붙어 봤겠지만 실전에서는 상대한적이 없는 임창용의 공은 분명 아오키에겐 부담으로 작용했을테니 말이다. 병살타를 의식해서 번트를 선택했을수도 있지만 그 타선들(1번-3번)은 모두 기동력이 뛰어난 선수들이다.
소속 요미우리에서는 원만하게 경기운영을 한다는 하라지만 그 원만함을 조금만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소심함이다.그리고 하라 감독을 가르켜 선수들을 믿는 야구를 펼친다는 평가도 있지만 요미우리의 그 막강한 멤버들을 감안할때 당연히 선수들을 믿을수 밖에 없지 않는가? 여타의 감독들에 비해 잡초와 같은 야구인생 길을 걸어보지 않았던(하라는 현역시절 나가시마의 대를 잇는 대형 3루수로 요미우리 토종거포 출신이다) 그의 원만한 야구스타일도 국제대회에서는 발목을 잡을 여지가 크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부분에서는 우리 김인식 감독이 한수 위다.
[경기전 대표팀 선수들의 타격훈련을 지켜보고 있는 김인식 감독/ ㉧ daylife.com]
이번 한-일전에서 우리팀은 타자들의 출루가 부족해 번트를 생각할 기회가 적었지만 4회초로 시간을 되돌리면 얼만큼 선수들을 믿고 배짱을 부렸는지 알수 있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이번 한-일전에서 첫 안타가 3회말 1사 후에(조지마) 나왔다. 그 이전까지 양팀타선은 매이닝 삼자범퇴를 당했는데 경기 양상을 봤을때는 선취점이 중요했다. 누가 보더라도 이 경기는 투수전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4회초 이종욱이 볼넷으로 출루할때 정근우의 희생번트를 예상했다.
1사 2루 상황만 만들어 놓으면 정교한 김현수와 한방이 있는 김태균이 뒤에 있기에 둘 중 한명은 해결할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인식 감독은 정근우에게 과감한 강공을 지시했고 결과는 안타. 무사 1,2루의 황금찬스를 잡게 된다. 정근우의 안타는 이날 한국이 쳐낸 첫 안타였다. 물론 김태균의 적시타로 결승득점을 올리며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이전까지 이와쿠마의 투구에 전혀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우리팀 타선을 감안했을때 김인식 감독의 강공작전은 작년 세이부의 와타나베 감독을 연상시킬만큼 배포 큰 마인드였다. 물론 무리한 베이스런닝으로 정근우가 3루에서 아웃되고 이후 김태균까지 견제사를 당했지만 말이다.
경기가 끝난지 이틀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하라감독의 8회말 작전은 일본은 물론 미국에서도 의문점을 표시하고 있다. 도루 성공률이 무려 80%가 넘는 1루주자 이치로, 정교함은 물론 장타력까지 겸비한 대형 유격수인 나카지마, 그리고 타격기계 아오키. 이 연결고리 타선에서 아웃카운트 하나를 버리고 아오키의 동점 적시타만을 기대했다? 물론 결과론이지만 하라는 역전까지 가능했던 이 황금찬스를 스스로 걷어차 버리지 않았나 싶다. 물론 임창용이 쉽게 당할 투수는 아니지만 말이다.
나라를 대표해서 나온 초일류급 선수들은 경험은 물론 기술에서도 최고의 선수들이다. 경기흐름을 알고 경기를 펼친다는 뜻으로도 해석할수도 있는데 하라의 지나친 소심함이 영봉패의 수모로 되돌아 왔다고 본다. 앞으로 우리와 몇차례 더 상대하게 될 일본야구. 다음번 대결에서는 9일 경기와 같은 상황이 다시 찾아오면 일본이 어떻게 대처 할지를 지켜보는 것도 또다른 흥미꺼리중 하나다.
사진/ daylife.com
윤석구 (http://hitti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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